[그때 그 사인] ep.1 조선인이라서? 의문에 싸인 일본 슈퍼스타 역도산의 죽음, 그 진실은?
역도산은 누구인가
역도산은 본명 김신락으로, 1924년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조선인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씨름과 스모를 거쳐 프로레슬링의 전설이 되었다. 강한 체격과 훈련을 통해 스모계에 입문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요코즈나에 오르지 못한 현실에 좌절하고 스모계를 떠났다. 이후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을 배워 일본에 들여오며 국민적 인기를 얻게 된다.
일본의 영웅이 된 조선인
역도산은 1952년 프로레슬링 협회를 설립하고, 미국식 프로레슬링을 일본에 본격 도입했다. 1957년, 외국인 선수 로즈와의 경기는 TV 시청률 87%를 기록하며 일본 전역을 열광시켰다.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국민의 열망을 대변하는 인물로 떠올랐으며, ‘천황 다음 역도산’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그는 리키 맨션, 리키 스포츠 센터 등을 운영하며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충격적인 죽음과 그날의 사건
1963년 12월 8일, 역도산은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 조직원과의 다툼 끝에 복부를 칼에 찔렸다. 처음에는 상처가 크지 않다고 판단해 지인 병원(산부인과)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았으나, 이후 복통이 악화되며 다시 병원을 찾게 된다. 외과의가 출장을 와서 수술을 진행했고, 이후 상태가 악화되면서 재수술이 이뤄졌으나 결국 12월 15일,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망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의혹

첫 번째는 ‘초밥과 사이다’ 섭취설이다. 수술 후 회복 중이던 역도산이 금식을 어기고 초밥과 사이다, 심지어 술을 마셨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로 인해 복막염이 악화되었고, 부검 결과 장 천공과 범발성 화농성 복막염이 확인되었다.
두 번째는 ‘정치적 모살설’이다. 역도산은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김일성으로부터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는 배려를 받고 벤츠를 선물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 역시 그를 극비리에 초청해 국빈 대접을 하며 정치적으로 중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내 극우 세력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정치적 배경에 의한 조직적인 암살일 수 있다는 의혹이 있다.
세 번째는 ‘의료 사고 및 마취 사고설’이다. 수술 후 상태가 호전되는 듯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점, 마취 상태에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 당시에 복합적인 약물 복용 이력 등은 의료진의 과실 가능성을 시사한다.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과량의 마취제가 투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진짜 사망 원인은?
부검 결과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장 천공에 의한 범발성 화농성 복막염이었다. 복강 내 장 내용물 누출로 인해 고름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이는 결국 패혈증 쇼크로 이어졌다. 즉, 복부 자상 이후 제대로 된 응급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원 선택과 수술 타이밍, 이후의 회복 과정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영웅의 허무한 최후
역도산은 링 위의 영웅이자, 성공한 사업가, 조선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정체성을 지켜내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단 한 번의 충돌, 단 한 번의 선택, 그리고 적절하지 못한 의료 환경이 맞물리며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의 죽음에는 정치, 민족, 의료, 인간적 자만 등 모든 요인이 뒤얽혀있다.
역도산은 링 안에서는 승리자였지만, 링 밖의 복잡한 세계에서는 결국 희생자가 되었다. 역도산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죽음은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민감한 교차점에서 회자되고 있다.